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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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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소개

天下正義之事

김시현

약산 김원봉의 든든한 사상적 동지였던 김시현 의사는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3·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 활동 등을 하면 서 1920년 9월경 의열단이 국내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의 요인 암살 및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을 시도 할 때 이에 가담한다.

그러나 의열단 요원 김재진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이후에도 수차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그때마다 투옥되고 풀려나길 반복하게 되어 결국 광복을 맞아 풀려나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1952년 6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6·25 기념식장에서 유시태로 하여금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하 였으나 권총이 불발에 그쳐 실패한다.

김시현 의사 또한 이 사건 주모자로 무기징역으로 받고 복역하다가 4·19 혁명과 함께 복역 만 7년 10개월만인 1960년 4월 28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에 다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6년 83세로 서거하였다.

김익상

김익상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1925년에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지만 김익상의 후기 행적에 대한 이른바 정설은 이렇다. 1943년, 김익상은 20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만기 출소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일본 경찰이 그를 연행해 갔고 이후로는 아예 종적이 묘연해져, 일본 경찰에 의해 암살당한 게 아니냐는 게 현재의 중론이다. 그 때문에 김익상이 언제 사망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김익상이 1943년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김익상이 언제 죽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김익상의 시신조차도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다.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당시 의열단원들은 거사 이후 죽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살아 돌아오자 의열단에서는 그에게 본분을 다했으니 앞으로 자유롭게 살 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계속 의열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지섭

1884.07.21~1928.02.20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본관 풍산(豊山)

1884년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아버지 김병규와 어머니 신천 강씨 사이에 2남 중 장남 으로 태어났다.
젊어서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 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 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이후 의열단에서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고,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루트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운반선 '천성환호'를 통해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열흘 후인 12월 31일, 천성환호는 일본 후쿠오카 현 야와타제철소에 도착했다.
열흘간이나 배밑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한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 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야와타 시(市) 여관에서 1월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했다. 그러나 도쿄에 출발하자 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회의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회의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고쿄(일왕의 궁성)로 바꾸게 된다.
1924년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덴노가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된다.

결국 김지섭은 사건이발생한 지 1년이 거의 다 된 1927년 10월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28년 2월 22일에 옥중에서 병사해 45세로 순국하고 만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저 김지섭 의사의 의거건을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일본 고위층 몇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고 한다. 아편과코카인을 밀수하는 일본인으로 가장했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 창고에서 숨어 있었다.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열흘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한다.

김학철

1916년 ~ 2001년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홍성걸,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 지하테러활동 종사했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었으며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해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어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 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 절단수술을 받았으며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어 1945년 10월 6일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열”,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북조선으로 건너가 노동신문 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 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1952년 12월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 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문화혁명으로 반동분자가 되었다가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어 1983년에 정식으로 누명을 벗었다. 1983년 김학철은 중국국적을 취득, 1989년 12월에는 49년 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었고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 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였다.

나석주

1892년 ~ 1926년

나석주 열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아버지 나병헌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배운 소년 나석주는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를 거치며, 몸과 마음이 굳센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후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한다.

3월 하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
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도답지 않게 모두 최 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최부자도 그제서야 좌정을 하고 냉정을 찾았다. 그때 한 복면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말 뜻을 알아차린 최 부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6인조 강도들이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너, 석주로구나! 그 복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춘부장 어른께서도 편안하신가?” 깜짝 놀란 석주는 복면을 벗고 최 부자 앞에 조아렸다.
나머지 다섯 명도 얼굴을 드러냈다.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가 그들이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나! 돈은 무려 630원(圓)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6인조는 크게 감동하여 큰 절을 드린 다음, 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이 떠나고 나면 즉시 일경에 연락하여 권총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일경이 눈치 채면 봉변을 당하십니다.” 6인조 강도단은 4월에도 다시 황해도 안악군의 부호들인 김응석, 원형락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그 활동이 신출귀몰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하자 나석주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20년 11월 22일이었다.
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다.

나석주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과 김원봉을 만나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의열단에 가입하고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략전술을 연마했다.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 전용여관 동춘전에 들었다.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뒷벽 기둥에 던져진 폭탄은 불발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폭탄을 입수할 때 시험을 하지 못한 점, 6개월간의 보관기관 중 뇌관에 녹이 슬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회한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다행히 일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나석주는 태연하게 정문을 나섰다.
동양척식회사로 들어서면서부터 1층에서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에게 사격한 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기술과장실에 나머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내려오며 2명의 일본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거리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또 불발이었다. 황금정 정목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경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졌다.
나석주는 운집한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는 3발을 쏘았다. 이어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격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나 석주는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田畑唯次] 등을 사살한 후에 전봇대에 기대어 스스로의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박열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아명은 준식이었다.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서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로 전학해 수학 중 3.1 운동과 관련되어 퇴학을 당한 뒤, 일본국으로 건너가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이소쿠가 쿠엔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920년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인 1921년 정견 차이로 말미암아 김약수를 위시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을 위시한 아나키스트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된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인 '흑로회'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기관지 "〈후데이센진〉"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일본국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테이센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장난을 이용한 조롱이었다.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을 위시해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반일 활동을 더욱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학살을 피해 피신하였으나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일본국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구매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국 행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때 재판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비범한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 모두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그리고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둘은 옥중에서 결혼하였다.
이때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 스캔들로 판사는 해임되고 정치 공세 탓에 1927년 당시 일본 내각이 총 사퇴했다.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의문사하였다. 자살이라는 설과 당국의 암살이라는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후미코의 시신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수습하여 박열의 가족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이후 44세에 석방되었다.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와 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 발족하였다.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일시 귀국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 한국전쟁 도중 납북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잔류했다.
그렇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간 후엔 한국전쟁 휴전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 묘지에 있다. 박열과 아내 장의 숙(1947년 결혼. 1976년 작고) 사이에 낳은 1남 1녀 중 아들 박영일은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육군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준장까지 지냈다.
장의숙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한 뒤에도 후미코의 기일에는 집에서 묵상을 하며 그녀를 추모했다고 한다.

박재혁

1895년 ~ 1921년

박재혁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부친 박광선과 모친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천택·오택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1913년 선생과 최천택 등은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어 1917년 6월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상으로 일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고,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자 이에 대하여 복수를 결의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동래 부산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일제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경찰에 의해 탐문되기 시작하자 하루빨리 거사를 단행하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파 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920년 9월 14일, 중국인 고서상으로 가장한 뒤 중국 고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시모토 경찰서장을 찾아가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 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지자 경찰서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선생도 폭탄이 터지면서 오른쪽 무릎 뼈에 중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장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절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무렵 동지인 최천택이 자주 면회를 갔는데 당시 선생은 면회를 온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하였고 1921년 5 월 5일 최천택이 다시 면회를 갔을 때,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 하였다.
그후 선생은 5월 11일, 결국 단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해방 후 선생의 시신은 정공단에 합사되었다가 1969년 4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남자현

영화 암살 ‘안옥윤’ 역할의 실존 인물이자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던 남자현 열사는 자신의 손가락 3개를 베어 가며 혈서를 써 ‘독립계의 대모’, ‘세 손가락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이봉창, 신채호 등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포함됐다.
이들과 함께 최고의 훈장을 받은 여성은 단 한 명, 역사 속에 묻혀 이름조차 낯선 남자현이 훈장의 주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40여년 전인 1873년 태어난 남자현은 24세 때 의병 전투를 치르던 남편을 잃었다.
38세 때는 나라마저 잃었다. 경북 영양에서 양반가의 며느리로 흔적 없이 살아가던 남자현은 1919년 2월, 47년 만에 돌연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다.
‘3·1만세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는 왜 이런 질곡의 역사 속에 태어났으며 이토록 고통 받는 땅 위에 피어났는가?’ 평생 가슴에 간직했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남자현은 미지의 거친 땅 만주로 떠난다.
고향을 떠난 뒤 열흘 간의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만주로 간 남자현은 사분오열하는 독립운동의 뼈아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분파를 극복하고 통합으로 나아가는 운동에 앞장섰다.
만주에서 보낸 8년의 세월은 그녀를 강인한 지사로 만들었다. 1926년, 남자현은 길림에서 동지들과 함께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녀는 만주를 떠나기 전 아들 김성삼에게 “나라가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나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 나라의 혼을 말살하는 사이토의 목숨을 끊어 조선을 부흥시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요, 시대가 원하는 책무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국경을 넘어 서울로 잠입했고, 피말리는 작전 일정 속에서 민족의 적을 처단할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죽음을 넘나드는 추격전 끝에 저격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61세의 나이로 이번에는 만주국의 일제 실세인 전권대사를 죽이러 간다. 하지만 그녀의 암살 계획은 내부 밀고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만다.

거사에 실패하고 하얼빈 감옥에 갇힌 그녀는 단호히 단식을 선택해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남자현은 임종의 자리에서 아들에게 200원을 주며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해방의 희망을 지워가던 1933년, 남자현은 오로지 신념 속에서 조선의 해방을 굳게 믿은 것이다.
실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남자현이 남긴 독립축하금은 이승만, 김구 등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스스로를 혁신하며 나라를 되찾는 시대의 소명에 몸을 던진 남자현. 저자는 "끝없는 투쟁과 뜨거운 민족애, 그리고 서슴없는 단지혈서와 일제 요인 처단의 면모에 있어 안중근에 비길 만 하다."며 남자현에게 '여자 안중근'이라는 별칭을 선사했다.
독립운동투사 남자현의 삶이 담긴 책 '나는 조선의 총구다'를 보면 "무관심과 망각 속에 묻혀버린 독립운동의 여걸 남자현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 행적과 삶의 의미를 기리고 싶었다.”는 저자의 소 감이 나온다.

최수봉

최수봉은 이명이고, 호적상의 이름은 경학이다. 최수봉 의사는 1894년 3월 3일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92-3번지에서 기독교를 믿는 부 모님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나 소년시절부터 향학의 열성이 남달랐고 한문 서당을 거쳐 1905년에 밀양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는 일본인 교사가 조선 역사를 가르치던 중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남동생의 아우라고 말하자 소잔명존은 우리나라 단군의 중현손, 즉 손자의 손자라고 답했다.
그로 인하여 퇴학을 당했다. 그 후 그는 밀양의 사립동화학교에서 전홍표 교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2년 동래 범어사 안에 있던 명정학원으로 학적을 옮겨 졸업하였다. 1913년에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이 학교도 일제에 의해서 불온학교라고 하여 폐교를 당하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19년 3월13일 밀양 장날 윤치형, 윤세주와 3·13 밀양만세 시위로 참여자를 체포하기 시작할 즈음, 최수봉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만주로건너가게 되었다.
윤치형과 윤세주 역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안동과 봉천 사이로 동지들을 규합하려 다닐 즈음 그곳에서 최수봉을 만나게 되었고, 여기서 그는 고향 친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의열단에 1920년 6월에 가입하게 되었다.

의열단에서 행동 강령을 숙지하고 1920년 7월경에 밀양으로 조용히 돌아와 그해 8월 중순에 우연찮게 밀양을 찾아온 평안북도 창성의 사금광에서 일할 때 사귄 임태호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최수봉을 만난 임태호는 "나도 자네처럼 의열단원일세, 경상남도 내 각 관청에 폭탄을 던질 계획이 있어 이 일을 완수해낼 인물을 선정하라는 단의 명령을 받고, 중국에서 건너왔네.”라고 하면서 “그대를 촉망하여 밀양경찰서에 투탄을의뢰하고자 한다.”는 제안을 하자 최수봉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3일 임태호는 가죽 상자에서 대소 2개의 폭탄을 꺼내 최수봉에게 전달하고 장거를 빈다는 부탁의 인사를 남겨두고 길을 떠났다.
1920년 양력 12월 27일 오전 9시30분 경,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 스에지로가 서원 19명을 청 내 사무실에 모아 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 때, 최수봉이 현관을 통해 경찰서안으로 들어가 남쪽 창문에서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폭탄은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도순사 부장 쿠스노키 게이고(남경오)의 오른쪽 팔에 맞아 가볍게 굴러 떨어져 불발로 그쳤다.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순사들은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현관으로 뛰어 나오는 순사들을 향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은 복도 바닥에 떨어지며 폭음과 함께 작열하였으나 서류함 등만 약간 파손시켰을 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최수봉은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골목 안에 있던 황석이란 사람의 집안으로 들어가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으나 경찰들이 긴급히 후송하여 2주일 정도 치료를 시킨 뒤 심문을 하였다.
부산 지방법원에서는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지만 대구 복심법원 형사 2부에서 마에사와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최수봉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교수대에 올라 교수된 지 13분만에 절명하니 그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28세였다

황옥

1887년 경상북도 문경 태생으로 1920년부터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경기도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하던 중 의열단의 단원인 김시현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가 국내 활동 중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서 상해로 망명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중국 텐진으로 출장을 떠나 이 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기관 파괴와 일제의 요인 및 친일파암살 등의 지령을 받게 된다.
이어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받아 권동산, 김시현, 김재진 등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황옥은 의열단 요원 김재진의 밀고로 체포되어 192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장결핵과 폐렴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한다. 이후 1928년 5월 재수감되었다가 1929년 2월 다시 가출옥한다.
학계에서는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 실패한 이유는 황옥이 공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의열단에 접근해 무기의 국내 반입을 돕는 척하며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파주에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게 되고 이후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삶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