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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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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天下正義之事

창설

일본인 반전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가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 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는 국제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국민당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제1지대와 제2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하였다. 제1지대는 박효삼, 제2지대는 이익성이 맡았다.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창설되었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푸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제스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의용대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국민당군 과 연합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ㆍ포로심문ㆍ후방 교란 등을 담당했다.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후방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하였다.

분리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 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을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칭된다.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 에 연안파로 일컬어진다.

화북 이동과 조선의용군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중국국민당 및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협력관계였다. 공식적으로는...) 이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명칭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 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 많은 조선인 무장부대들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중국 산시성 윈터우디춘에 남아있는 조선의용대의 한글 구호에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도 있다. 1940년대초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 상당수는 일제 패망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고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강화 과정에서 8월 종파 사건으 로 모두 몰락하였다.

본대 잔류와 한국 광복군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300여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국민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 끌던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민족혁명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 되어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약했고, 해방후에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48년 남북협상회의 참석차 북을 방문한 이후 그대로 잔류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역시 8월 종파 사건 이후, 1950년대 후반 임정 출신 납북자들과 같이 중립화 통일안 주장하다 숙청당했다.

결말

일제강점기 말기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단체이지만, 분열 속에서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남북으로 흩어졌고, 그나마도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단체이다. 북으로 간 사 람들은 김일성의 1인독재에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숙청당했고, 남으로 온 사람들은 빨갱이라면서 묻혔다. 기존에는 국민당이 대일전쟁에서 소극적인 면을 보이자 더 적극적인 투쟁을 위해 팔로군에 합류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실제로 국민당도 중일전쟁에서 적극적이었다. 반면, 팔로군 쪽은 게릴라 전투 위주였으니 정규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최근 의 역사학계에서 조선의용대의 대다수가 중국국민당에서 이탈하여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 '아무래도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세력을 키우고자 한 것이 가장 유력하지않나?' 라고 보는 중이다.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 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 그 외 재미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군단 등등, 일제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단체 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해서 대한독립군단을 창설 했을 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 8월 종파 사건 이후에도 살아남은 일부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