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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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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天下正義之事

김산

1905년 ~ 1983년

일제시대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본명 장지학 혹은 장지락. 1905년 평북 용천 에서 태어났다. 1921년 일본에서 고학으로 유학생활을 하다 북경으로 가서 경제학과 수업을 들었으며, 1922년부터 3년간 김충창(본명 김성숙) 으로부터 마르크 스 레닌주의를 배우고 공산당에 입당해 잡지 [혁명] 간행에 참여했고, 1924년 고려공산당 베이징 지부 설립을 주도하며 일본, 상해, 만주, 연안, 광동성 광주 등 무장투쟁 하였다. 1930년과 33년 각각 중국 경찰과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그는 1936년 중국공산당을 떠나 운암 김성숙 선생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이라는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어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 후 1938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일본 특무)로 또한 트로츠키파로 오인을 받아 같은 해 10월 연안의 항일군관학교에서 강의 도중 중국 공산당 에 체포된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총살되었다.

김원봉

1898년 9월 28일 ~ 1958년 11월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경성부 중앙중학교를 자퇴 후, 1918년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 하였다. 1919년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고, 1926년에는 보다 더 체계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국민당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 관학교에 입교했다. 이곳에서 얻은 군사지식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4기로 졸업 해 국 부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며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과 중국 국민혁명에 가담하였다. 그 후 국무위원, 대위원, 중앙위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

박차정

1910년 ~ 1944년

1910년 경남 부산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떠 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였고, 오빠 박문희, 박문호가 신간회, 의열단에 뛰어들자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체포, 구금을 당하였고 이후 동래청년회 부녀부장을 2년 동안 지낸 뒤,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 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후 상경하여 여성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 우회에 참여하면서 지도층으로 부상,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다. 1930년 11개 여학 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의 막후활동 관련자로 체포된 후, 3개월만에 풀려났다. 1930년 중국에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을 졸업 하고 의열단에 가입, 조선공산당재 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에도 참여했고, 1931년 김원봉과 결혼했 다. 1932년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 1935년 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 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관여,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서 무장투 쟁을 전개했다.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고, 후유증으로 1944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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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에게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남규 문하에서 공 부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의 뜻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 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칭다오로 망명, 안창호, 이갑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의 항일단체인 권업 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권업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강제 폐간되자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베이징 비밀결 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고,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가 되었다. 그 후 임시정부에 참가했다가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 임통치를 주장하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여, 1923년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임시정부를 해체,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조파와 대립하여 임시정부 존폐문제 논의가 결렬되고, 다시 베이징으로 가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을 조직에 가담하여 지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논설과 역사논물을 발표했다. 1925년경부터 무정 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 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1936년 옥사했다.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라는 결론은 그의 역사 연구에 반영,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민족사관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윤세주

1901.6.26 ~ 1942.6.3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일명 석정·소용·소룡.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밀양에서 주도하고,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지린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김원봉, 황상규 등과 의 열단을 조직하고, 1920년 황상규 등과 함께 총독부 및 주요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 고, 출옥 후에 다시 난징으로 망명, 1937년 조석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38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조직, 1942년 화북 타이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율성

1918년 ~ 1976년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 1933년 형을 따라 중국 남경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1934년 졸업 후 비밀활동을 하면 서 피아노를 배웠다. 상해에 가서 외국인에게 성악을 배운 후 1937년 프랑스에서 작곡공부를 했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 오월문예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 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에 도착, 섬북공학을 다니고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수학했다.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 과에서 활동했으며, 1937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1951년 4월 중 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 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연안송가]와 [팔로군행진곡]외에 [3·1행진 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