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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논란 작곡가 안익태보다 작사자 윤치호가 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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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길로 댓글 0건 조회 289회 작성일 19-02-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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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0-2
‘애국가’ 문제의 키맨은 안익태보다 윤치호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2019-02-07 06:00
"3.1운동=폭동" '윤치호 일기' 등에서 발견된 친일 행적
이완용도 못 해본 ’일본제국의원 귀족원 의원‘ 임명돼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최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에 대한 친일 행적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국민 10명 중 6명은 애국가 교체에 대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2019년 1월 21일)가 나왔다.

이는 “설사 애국가의 작곡자가 친일파라 해도 곡조에 딱히 친일적이라는 느낌도 없고 애국가 가사와 작사자엔 문제없는 같은데 왜 바꿔?” 라며 작곡자의 친일 행적만 부각된 상황에서 나온 여론조사 결과라고 분석된다.

말과 글은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다. 특히 반복되는 구호나 운문은 사람의 영혼까지 지배한다. 한국인의 일생에 제일 많이 부르고 듣고 접하는 운문은 애국가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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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는 연주곡이 아닌 가사곡이다. 악기로 연주만 하기 위한 곡이 아니라 연주에 맞춰 가사를 부르는 곡이란 것이다. 한 나라의 공간(지리)과 시간(역사), 지(知)와 정(精)을 하나의 노랫말로 응축한 애국가 가사는 그것의 곡조에 비해 중요하다. 즉 ‘애국가’ 문제의 키맨(key man)은 이미 베일이 벗겨진 작곡자 안익태보다도 여러 말 못할 요인들에 의해서 아직 베일에 싸인 작사자 윤치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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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의 베일을 벗겨 윤치호와 그가 지은 가사를 속속들이 파악한 후 다시 ‘애국가’의 교체 찬반 여론조사를 재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위원 대표 윤치호

을사늑약으로 외부(외교부)가 1906년 1월 문을 닫자 잠시 민간인의 신분이 된 윤치호는 여행을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펴낸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이하 윤치호 일기)'를 살펴본다.

1906년 7월 16일.
정오에 대구를 출발했다. 오후 4시 조금 넘어 부산에 도착했다. 머리를 맴도는 이런저런 생각들. 부산 기차는 성공작이다. 기차는 300마일(약 482㎞) 이상 상당히 비옥한 시골을 헤치며 달린다. 전 구간 내내 역에서 허가를 받고 장사하는 조선인 상인은 한 명도 없다. 간단한 다과를 파는 상인조차 일본인이다.
가는 내내 목격한 조선인의 가축우리 같은 집은 진흙구덩이보다 나을 바 없었다. 정말 가련했다. 밤에 조선인 집에나 마을에서는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불빛과 생기가 있다.

윤치호는 1906년 12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09년 9월 대성학교 교장을 겸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관민추도회 준비위원(한국 대표)을 맡았다.

1911년 9월 부친 윤웅렬이 사망하자 12월 남작 작위를 세습받았다. 1912년 2월 이른바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기소 구속되어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 ‘일본 천황’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9년 1월 최남선이 찾아가 독립운동 참여를 권했으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698-699쪽)

◆윤치호는 말했다. ‘3.1 폭동’이라고

1919년 3월1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윤치호는 무엇을 했을까. 상술한 '윤치호 일기'를 살펴본다.

--1919년(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화창한 날씨.
(중략) 1시 30분쯤 거리에서 군중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처럼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 아래 불을 보듯 훤한 위험을 향해 자진해서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우리는 골치 아픈 문제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회관을 완전히 봉쇄하기로 결정했다. 거리는 금방 군중 속에서 주동자들을 잡으려고 바삐 움직이는 군인·기마경찰·형사·헌병들로 가득 찼다. 모든 곳이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졌다.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굉장히 형편없는 것 같다.

--1919년(기미년) 4월 11일 금요일 화창한 날씨.
전국에서 벌어지는 독립 시위가 무의미한 대중 폭동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선동가들은 독립이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소요에 참가하라고 설득하거나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의 반일감정이 분출되고 있다. 비극과 어울리는 것은 순진하고 무지한 주민들을 죽음과 파괴로 몰고 가는 선동가들의 어리석음뿐이다. 선동가들은 순진하고 무지한 주민들을 위협하여 시위에 참가시키고 있다.

1919년 7월 예종석, 민원식 등 친일 인물들이 조선총독부 사주를 받아 질서 유지와 풍속 개량을 목적으로 결집한 경성교풍회 회장에 선임됐다. 같은 해 9월 전국의 조선인 유력자를 중추원에 모아 놓고 조선총독부 시정방침을 설명하고 시국강연을 할 때 경기도 대표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석했다.

1919년 9월 2일 경성역에서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오던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했다. 그날 '윤치호 일기'를 살펴보자

1919년(기미년) 9월 2일 화요일. 흐리고 후텁지근함. 밤에 소나기.
오후 5시에 사이토 제독이 서울에 도착했다. 오후 7시에 문희·선희를 데리고 램버스 감독 일행을 마중하러 역에 나갔다. 그러나 감독 일행은 오지 않았다. 에이비슨 박사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에이비슨 박사 말에 따르면, 어떤 멍청이들이 사이토 제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사이토 제독을 빗나간 폭탄 때문에 구경꾼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 씨 암살사건이 병합을 재촉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라구!

◆일본 남경함락(난징대학살) 기념제 제사장을 맡다.

윤치호의 종일매국행각은 일본의 중국본토 침략으로 개시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1937년에 노골화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윤치호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주최한 시국대응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고, 황군위문군 1000원(현재가 환산 약 3억원)과 국방헌금 4000원을 냈다.

이 무렵 애국 경기호 비행기 구입비 500원을 헌납하고 경성일보사에서 주최한 북지사변비상시국(일본의 중국 내지 침략으로 중·일전쟁)에 최남선과 함께 참석했다.

1937년 8월 15일자 '매일신보'에 ‘내선인(일본인과 조선인)은 동일운명 –거선(巨船)의 항해에 임하야’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같은 달 23일 조선 신궁에서 국가안태, 무원장구를 비는 기원제 발기인겸 위원을 맡았다. 9월에는 이 기원제 위원장에 취임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로 전국순회시국 강연반에 연사로 참여하여 평안남도 지역에서 강연을 했다.  12월 남경함락(난징대학살) 전첩봉고제 제사장을 맡았다.

1938년 2월에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 겸 실행위원으로 참여해 회장을 맡아 조선신궁에서 봉고제를 지냈다.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5월 친일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7월에는 전국조직으로 확대된 후 평의원회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앙기독교 청년회가 세계연맹에서 탈퇴하여 일본에 예족된 일본 기청(基靑)조선연합회의 회장을 맡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699~700쪽)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곧 이토 지코다

'윤치호 일기' 中에서

창씨개명 결정하다.
1940년(경진년) 5월 22일 수요일. 맑음.
서울 집. 오전 9시 30분 경복궁 동편 광장에서 중학생 및 대학생 3만명 이상이 운집한 가운데 천황폐하께서 학생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내리신 황국청년칙어 제정 2주년 축하식이 열렸다. 총독이 칙어를 낭독했다. 10시 30분에는 남학생들이 광화문통 끝에 있는 총독부 앞을 지나가며 시가행진을 했다.
오늘 오후에 툴주크 주스 6병이 들어있는 선물상자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 내 평생 처음으로 총독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아무래도 미나미 총독이 내가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를 읽고 기분이 좋았나 보지?

창씨개명을 하다.
1940년(경진년) 6월 17일 월요일. 흐렸다 개었다 오락가락.
서울 집. 오늘 오후 경성부청 인구조사과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변경서를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 지코다.

◆우리 민족의 아버지, 미나미 총독을 위해 총을 메고 나섭시다.

1941년 9월 6일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임전대책협력회에서 주최한 임전대책연설회에서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한다.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이라 하신 성의를 봉대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시는 미나미 총독은 우리 반도의 아버지이시며 우리 민족의 경애를 받고 계십니다. 미나미 총독의 총을 메고 나서라거든 총을 메고 나섭시다. 곡괭이를 메고 나서라거든 곡괭이를 메고 나섭시다. 일언이폐지하고 우리반도 민중도 내지(일본) 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

이 연설 다음날 9월 7일 임전대책협력회를 주도하며 종로에서 채권을 팔았다. 같은 해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경성부민관 대강당에서 주최한 결전보국대강연회에서 “일본제국이 영미(英美)를 상대로 일어선 전쟁은 동양민족을 영미의 압박하에 구해내자는 동양민족 해방의 성전인 것이외다. 그러므로 동양사람이 되어 가지고는 누구나 이 싸움에 나서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토지코 이동치호(伊東致昊)는 1942년 2월 국방비 5000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그해 5월 10일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 결정하자 '매일신보'에 '대어심(大御心) 천황의 배려에 감격'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고 연이어 1943년 11월 18일자와 22일자 매일신보에 총출진하라는 연설문과 학병을 보내는 명사의 말 – 장하다, 그대들 용단, 오직 순충봉공에 몸을 바치라 라는 격려문을 발표했다.

◆이완용도 못 해본 ’일본제국의원 귀족원 의원‘이 되다.

1945년 2월 11일 윤치호는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 촉진을 목표로 '대화동맹(大和同盟)'을 창립해 자신이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박춘금, 이광수, 손영목, 이성근, 이광수, 조병상, 진학문 등 기타 거물급 친일분자와 일본인 유력자 등 모두 45명이 간부급으로 참가했다.

일제 극우당인 대의당(大義黨)의 자매단체인 대화동맹은 대의당의 이면적 폭력공작을 은폐하는 위치에서 표면적·평화적인 사회정책을 담당한 단체였다. 황민자질 연성, 결전체제 확립, 내선일체 완성, 증산·공출책임 완수 등을 운동 목표로 한 대화동맹은 광복의 그 날까지 존속하였다.

대화동맹 위원장 윤치호는 그해 2월 말부터 4월까지 조선인 참정권 허용에 대한 감사 사절단을 꾸려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1945년 4월 3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勅選·천황의 선발)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 화족 의원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국세납부자로 구성됐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예는 1945년 4월 7명과 이전에 선임된 3명, 모두 10명에 그쳤다. 친일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도 못해본 조선인 최고의 영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광복 나흘째 8월 19일 윤치호가 살던 경기도 개성시 송도면 고려정 집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 존 하지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남아서 협력해야 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조선의 독립은 독립 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여기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독립운동가들은 한 것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는 위선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조선의 광복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덕분이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덕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치호는 1945년 12월 6일 사망했다.([친일인명사전] 2권 –702쪽)

◆지식인의 탈을 쓴 친일매국의 대부

한국의 문헌에는 대개 윤치호가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개화파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합방 이후부터 친일파로 변절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1907년에는 독립운동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윤치호는 1904년 8월 일본제국에 대한제국의 모든 정책결정권을 상납한 갑진늑약을 체결했고 1905년 11월 외교권을 상납한 을사늑약 체결 주도했다. 1909년 11월에는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사살된 이토히로부미 추도행사 한국측 대표를 맡았다. 합방 이듬해 1911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과 청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내면을 자술한 그의 영문일기(1895~1943)는 윤치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뇌하는 식민지 근대적 지식인’의 탈을 쓴 ’종일매국 민족반역자의 대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언해주고 있다. (10-3에 계속 이어짐)

◆◆◆◆◆<주요 참고문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009.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1971.
 

배인선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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